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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막내 후배 직원이 작은 실수를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얼마간 함께 일하며 아쉬운 부분도 있고 해서 쓸데없는 잔소리를 좀 했나보다.

물론 회사생활을 한지 얼마 안되는 사회 초년생이고 아직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보다 개인의 감정이 앞서는 어린 친구인데, 감춰왔던 작은 몇몇 실수들이 뭉쳐 커다란 문제로 붉어져 나온 상황이어서 선배로써 더이상 지켜보기만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결국 뭐 듣는 입장에서는 잔소리처럼 들렸으리라.

얼마간 나의 이야기를 듣던 후배 직원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말이 길어질 수록 눈물도 늘었다.

눈물을 철철 흘리는 후배를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퇴근하며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마치 사기구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들여 만드는, 아주 길고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만드는 사기구슬.

 

성장기의 우리들은 스스로 만들어지지 못하는 찰흙덩어리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부모에 의해 만들어 지는 찰흙 반죽 같은 느낌이랄까? 흙이 어찌 스스로 반죽을 하겠는가. 어린 시절의 우린 그저 부모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어떤 부모들은 아주 신경써서 둥글게 둥글게 예쁜 모양으로 반죽을 다듬으며 살을 붙여 나가지만 또 어떤 부모들은 삶의 고된 시간속에 자식이라는 구슬을 만드는데 정성을 다하기 어렵기도 하다. 물론 둥글게 빚는데 전혀 관심도 없는 부모도 있다. 그냥 대충 흙 덩어리를 어딘가에 툭 던져 놓고 마는 그런...

물론 큰 돈을 들여 둥근 반죽 기계를 산 부모는 완벽하게 둥근 구슬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기계를 살 돈이 없는 부모도 열심히 주무르고 빚어주면 기계 못지 않은 둥근 찰흙 구슬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계로 만든 것처럼 둥글지는 않겠지만 인간미는 분명 있는 그런 둥근 구슬이 만들어졌겠지.

 

정성들여 만들어진 동그란 찰흙구슬과 대충 얼버무린 모난 흙 덩어리는 이제 성인이 되며 서서히 굳어져 간다. 

동그랗고 예쁘게 잘 만들어진 구슬은 어느곳이든 잘 굴러가고 잘 구를 수록 점점 더 동그래지겠지만 정성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구슬은 구르지 못하고 멈추어 있거나 다른 구슬들 사이에서 이상한 구슬로 보이며 그 모양 그대로 점점 더 굳어져 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 다 마르지 않았기에 모난 흙 덩어리도 열심히 이리로 저리로 굴러다니면 어떻게 될까? 결국 둥글 둥글 해 지겠지? 성인이 된 우리는 스스로를 굴려가며 자신을 둥글게 만들어야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 겉은 이미 말라가고 있기 때문에 갈라지고 지신을 부스러 뜨리며 둥글게 만들어야 된다. 

힘들겠지만 스스로를 굴리고 부딪혀서 모난 부분을 깎아내야 한다. 그래야 둥글게 될테니까.

아직 마르지 않은 모난 구슬이 멈추어 있지 않도록 친구들이, 가족이, 사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는 영영 동그란 구슬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여기서 더 굳어져 버리면 이제 동그란 구슬이 되는건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한다. 물론  둥근 구슬이 예뻐서 모두가 그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우리 각자의 인생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둥근 구슬이라고 하자는 거다.

 

나이가 들며 직장에 와보니 여기는 이게 더이상 구슬을 둥글게 빚는 곳은 아니었다. 아무도 내가 둥근 구슬이 되는 것에 관심은 없었다.

 

 

가마

 

굳은 흙덩어리를 상상도 못할 뜨거운 불꽃으로 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바로 그 가마.

직장은 흙 구슬들에게 가마와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련과 고통이 주어지는 곳.

도예공들인 도자기를 연일 만들지만 그렇다고 만들어 지는데로 가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듯이 흙덩어리 구슬이 만들어 졌다고 해서 모두 같은 시기에 가마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취업이나 자신의 일을 찾아 시작하는 시기도 다르고 또 뒤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 시간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힘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힘든 시간이 오고 그 시간들이 결국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나니 그 시간이 내가 마치 불가마에 들어간 도자기와 같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힘든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며 오늘에 왔기 때문이다. 아직 목표한 온도에 오르지 않은 도자기를 급하게 꺼내면 깨지거나 색깔이 안나오거나 결국 버려질 폐기물이 되듯이 우리는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며 시나브로 단단한 사기가 된다.

초벌구이 재벌구이를 겪으며 더욱 단단해지고 유약같은 멋진 동료들을 통해 빛나는 영롱한 도자기가 구워진다.

그런 힘든 시간들은 지금까지 열심히 굴러다니며 완전하리만큼 둥글게 만든 나를 진정 빛나는 사기구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시간들이라 생각이 들었다.

 

잘 빚어진 둥글고 예쁜 구슬은 몇차례 가마를 거치며 유약도 발리고 결국 빛나는 사랑받는 구슬이 되어갈 것이다.

 

나는 부모로써 나의 아이들을 예쁘고 아름다운 구슬로 빚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걱정도 된다.

나는 평생토록 그 구슬을 계속해서 빚을 수는 없다.

흙은 언젠가는 마를 것이기 때문이고 내 손을 떠난 구슬은 더이상 내 손으로 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눈물을 흘린 그 후배에게 나는 좋은 가마 역할을 해준 것일까 .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흙더미를 조금 더 둥글게 다듬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 구워지지 않은  흙 구슬에 괜한 생채기만 남긴 것은 아닐까

 

 

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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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

나와보니 발에 신겨져 있는 신발은 내 것이 아닌 아들내미 신발이었다.

사실 내 신발과 아들내미 신발은 같은 브랜드의 같은 상품이며 색깔만 다른 동일한 신발이다.  심지어 이 녀석이 불쑥 자라는 바람에 이제는 사이즈까지 동일한... 정말 같은 신발이다. 나는 흰색, 아들 녀석은 검은 색을 신기는 했지만 바로 내 지금 신발의 이전에 신었던 신발이 지금 아들내미가 신는 것과 같은 바로 같은 모델 검은색 신발이었으니 순간 헷갈릴만도 하다 싶었다.

결국 이런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서 웃음짓는 아내의 말은 이해가 간다. 같은 브랜드의 같은 신발이니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내 발에 신겨져 있는 신발은 내가 매일 신어왔던 바로 그 같은 신발이 아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색상만 다를 뿐 같은 브랜드에 같은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발에 닿는 감촉 하나 하나가 낯설었다. 나올때는 몰랐지만 걸을때마다 느껴지는 그 낯설움같은 느낌? 어릴때 아빠의 구두를 신고 마당을 거닐때 만큼이나 낯설은 발의 감촉.

 

기껏해야 30분정도, 내 것이 아닌 신발을 신으며 재미 있는 느낌을 받았다.

공장에서 똑같은 가죽으로 똑같은 공정에 의해 똑같은 사이즈로 만들어낸 신발일 것인데 내가 신어왔던 신발과 아들내미의 신발은 왜 이다지도 다른것일까.

사람의 발모양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길레 .... 

어쩌면 나에게 완벽하게 맞추어진 세계에서 아주 조금만 다른 세계로 바뀌어가도 이렇게나 어색하고 불편한것은 비단 우리의 삷의 전반을 보지 않아더라도 작은 신발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새삼스레 느꼈달까?

이런 나의 안정된 삶의 주변에 있는 가족들, 직장 동료들 역시 너무나 익숙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변인들에게 감사하고 내 가족에게 한번더 감사하는 마음을 보내본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익숙한 그 느낌의 펜스를 넘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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